요미우리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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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의 프로야구단. '''일본프로야구 최고 명문 구단이며, 종목을 초월해 일본 전체를 대표하는 스포츠 클럽'''이다. 그리고 일본프로야구 출범 이후 팀명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유일한 NPB 원년 구단이기도 하다.[8] 연고지는 도쿄. 홈 구장은 일본 최초의 돔 구장인 도쿄돔.[9] 팀 컬러는 주황색이다.
2.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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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는 자빗(Giants+Rabbit)으로 토끼를 소재로 한 마스코트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자에 있는 YG 교차 로고의 형상에서 토끼 모양을 착안해낸 것에서 비롯됐다. Y자의 갈라진 부분이 귀가 되고 G와 교차되면서 얼굴 모양을 형성하고 Y의 받침 부분이 몸통과 발의 형태를 하는 형식으로 디자인되었으며 1992년부터 채택되었다. 1970년대에는 미스터 자이언츠라는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가 마스코트였고 1980년대에는 쌍방울 레이더스 비슷하게 팔다리가 달린 야구공이 헬멧을 쓰고 마녀 빗자루처럼 야구 배트를 타고 있는 '배트를 탄 소년' 마스코트였다.
일본에서는 보통 요미우리 자이언츠라고 다 부르지 않고, 줄여서 일본식 애칭인 '거인(쿄진・巨人)'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야구중계의 스코어 표기에서도 지역명이나 스폰서명의 축약이 아니라 거인의 앞글자인 '巨'를 사용한다. 모회사 이름인 요미우리로 부르는 일은 [10] 거의 없다. 한국에서는 교진군이나 요미우리로 부르는 경우가 많고 몇몇 한국 매체의 경우는 한자로 거인(巨人)이라 표시한다. 1990년대까지 미국의 보도 매체에서는 미국식으로 TOKYO GIANTS로 표기됐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YOMIURI GIANTS로 표기하는 매체의 비중이 늘고 있다.
일본 주식 시장에 등록된 팀명은 '(株)読売巨人軍'. 그러나 말만 주식회사지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으로부터 재정의 대부분을 지원받는다. 모기업이 요미우리 신문인 만큼 창립자 및 간부들이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등 극우적 발언을 한 사례들이 있었다.[11] 다만 아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구단 역사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를 빛낸 구단 OB 중에는 상당수의 재일 한국인이 있고, 지금까지 한국인 선수를 가장 많이 데려간 프로야구단이기도 하다.[12]
2000년대 초반까지는 당연히(?) 요미우리 계열사인 니혼 TV가 금요일 경기를 제외한[13] 홈 전 경기를 중계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들어 구단의 성적이 중하위권을 맴돌아 시청률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적도 있었다. 전 경기 중계라고 해도 한국의 케이블 TV처럼 1회 초부터 9회 말까지 완전 중계도 아니었고 정규방송 편성에 따라 3~4회부터 중계를 시작하거나 7~8회에 방송을 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14] 대표적인 예가 왕정치가 756호 홈런을 친 경기. 경기가 중계는 됐지만 정작 홈런을 친 순간은 정규 편성 중이던 예능 프로 방송 때문에 묻혀버렸다(...). 중계 방송이 시작된 시점은 이미 왕정치가 홈런을 치고 나서 20분이나 지난 뒤였고(...), 전 일본의 야구 팬이 그 해 시즌 시작부터 기다려온 그 순간을 생중계를 하지 않는 병크로 인해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친 건 당연한 수순. 결국은 니혼 TV도 전 경기 중계를 포기하고 대부분의 경기 중계를 니혼TV 계열 위성 방송사인 G+로 옮겼으며[15] , 라디오는 도쿄의 주요 3개 라디오 방송국( [16] , 닛폰 방송[17] , [18] ) 외에 요코하마시에 있는 RF 라디오 일본(간사이권에선 라디오칸사이)이 전 경기 전담 중계를 담당한다. 대신 여기서는 1회부터 경기 끝날 때까지 완전 중계니까 팬들에게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인터넷 중계의 경우 GIANTS Live Stream에서 담당하는데 월 1,500엔을 내면 도쿄돔 홈경기, 원정 한신전, 원정 교류전까지 다 볼 수 있다. 인터넷 중계에 소극적인 야쿠르트, 요코하마, 히로시마, 주니치[19] 와는 대조적. 그리고 해외팬들을 위한 홈경기 중계 서비스를 2017년부터 시작하였다. 일본 국외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는 '''유료'''이며 언어는 일본어로만 돼 있으므로 일본어능력은 필수다. 가격은 1달에 11,200원으로 꽤 비싸다. 그래도 요미우리 팬이고 토쟁이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시청하는 건 싫고 돈을 내고라도 합법적으로 시청하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구글에서 海外専用巨人戦完全中継 를 입력하면 주소가 나온다.
그리고 2019년부터 DAZN을 통해서 인터넷중계를 시작하는데, 요미우리신문과 포괄적 제휴 협정을 맺었으며 오래 전부터 협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야쿠르트는 중계권문제로 DAZN이 중계하지 못했다.
요미우리 계열 스포츠신문인 스포츠호치(スポーツ報知)가 사실상의 자이언츠 전담 매체다. 스포츠신문에 '거인'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지만 1면 기사로 요미우리가 올라오는 비율이 한신 전담 매체인 데일리스포츠보다는 덜하며 고교야구 기간에는 고교야구 기사가 더 많이 올라온다.[20] 2000년대 이전에는 블록지를 제외한 다른 스포츠신문도 요미우리 위주의 보도를 했으나 현재는 지역밀착을 바탕으로 한 퍼시픽리그의 인기 상승으로 균형이 잡혀져 있는 상태.
2019년 이후 유튜브 계정 운영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썸네일이 국내 프로야구단 유튜브와 비교하면 촌스러운 편이지만 있을 건 나름 다 있으며 한미일 프로야구 구단 중 유튜브 구독자 1위를 달성할 만큼 유튜브 운영에 공을 들이고 있다.
3. 공공의 적
일본에서 제일 안티가 많은 스포츠 클럽이다.[21]
한때는 일본 야구계의 독보적인 돈지랄 구단이'''었'''는데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요미우리 그룹이 야구팀에 붓는 애정은 큰 편이라, V9를 달성했던 시절의 과거에는 전국에서 유망주를 데려와서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게 해줬고[22] , 드래프트제도가 생기면서 유망주 풀을 독점적으로 확보하지 못하게 된 뒤로는 FA에 크게 투자하여 타구단의 A급 선수를 쓸어담으면서 언제나 선수층을 두텁게 유지하였다.
그러나 2015년, 2016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1인당 평균 연봉으로 요미우리를 이겼고, 퍼시픽리그 구단들이 공격적으로 투자를 진행하면서 자력생존을 목표로 흑자운영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돈지랄 끝판왕이라는 평가도 점점 옛말이 되고 있다'''. 게다가 요미우리신문은 인터넷과 OTT의 발달로 인해 주요 돈줄이었던 신문사업 및 방송사업이 위기를 맞고 있어서 2010년대 들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자력생존을 위해 뛰고 있는 상황. 하지만 FA 영입에 있어 요미우리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큰 손으로 군림하고 있는데, 2018년 들어서는 1군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하는 FA 선수들의 고비용 저효율 악성계약 및 프랜차이즈 선수의 보상픽 유출[23] 이 이어지고 있어서 인재육성에서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도 히로시마에서 데려온 마루 요시히로는 활약을 해주고 있으나 모리후쿠 마사히코 등이 소프트뱅크의 첩자 역할을 하며 신나게 먹튀짓을 하고 있다(...). 또한 2019년, 2020년 일본시리즈에서의 삽질로 인해 퍼시픽리그 견제는 안 하고 센트럴리그에서 그 해 최고의 선수를 FA로 계속 사오다 보니 센트럴리그 타팀 전력은 약해지고 퍼시픽리그 전력만 더 강하게 해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돈지랄을 한창 해대던 요미우리의 모습 중 대표적인 일화로, 요미우리 회장이 2014년에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로 진출한 '다나카 마사히로'한테 '우리 팀 선수가 된다면 연봉 10억 엔을 주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을 들수가 있다. 당시 엔 시세를 감안하면 못해도 '''90억 원 이상'''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요, 달러로 환산해도 '''800만 달러'''는 그냥 넘어가는 큰 금액이다. 그러나 다나카는 그 2배가 넘는 연봉, 그것도 7년이나 보장받고 양키스로 갔다.(...) 아무리 요미우리라도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상대가 안된다는 적절한 예시. 그것도 요미우리보다 더한 돈지랄의 끝을 보여주는 양키스이니... 그리고 2017년 시즌 종료 후 옵트아웃을 행사하지 않고 양키스에 잔류하였다.
이런 모습 때문에 일본 리그의 좋은 선수란 좋은 선수를 싹 쓸어가는 관계로 타 구단 팬들 중 특히 안티가 많다. 다만 한국에서는 한국인 선수들이 많이 거쳐갔었고 이승엽이 한창 활동하던 무렵에 중계까지 해 줘서 그런지 요미우리 구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다. 대만에서는 양다이강의 활약으로 인해 일본프로야구 중 최고 인기구단이며, 요미우리 경기를 비디오랜드(衛來體育) 채널에서 독점적으로 중계해 준다.
사실 이것이 이들 구단 탓만 할 것이 아닌 게 선수들 입장에서 보면 우승 가능한 구단, 여기에 누구나 알고 있는 명문 구단에서 뛴다는 것은 프로 선수 인생에 있어서 희망 사항 중 하나이다. 당장 야구만이 아닌 타 구기 종목 프로 구단만 봐도 그렇다. 괜히 칼 말론[24] 이나 게리 페이튼 같은 명선수들이 단기 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LA 레이커스에 입단했던 것이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거라면 한 번쯤 뛰어보고 싶은 명문 구단이라는 점 역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승 후보에 명문이란 두 가지 장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애초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체가 메이저리그와의 친선경기라는 사실상 국가대항전급 이벤트의 선발 팀으로 기획되었고, 요미우리 신문 창립자 쇼리키 마쓰타로가 '''일본프로야구 창설의 주역'''이기도 했으며[28]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요미우리 때문에 단일 리그였던 일본 프로야구가 양대 리그로 나뉘어졌을 정도.[29] , 한 일본 야구 팬은 '일본 야구는 요미우리와 안티 요미우리로 나뉘어진다'라고 말할 정도. 즉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는 곧 '요미우리와 요미우리에 대항하는 나머지 5+6개 팀'의 역사로 점철될 정도로, 요미우리는 '''영원한 수장'''으로서 일본 야구를 이끌어가고 있다. 요미우리가 특유의 돈지랄을 통해 앞서 나가고 나머지 센트럴리그 5개 구단이 그에 반기를 들며 도전하는 양상이며 안티 요미우리의 수장이 일본의 뿌리 깊은 관동-관서 라이벌 의식[30] 까지 곁들여져 있는 한신 타이거스, 그리고 신문사 라이벌[31] 이기도 하며 주부 지역의 대표인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라이벌 구도, 그리고 같은 도쿄 연고 팀임에도 교진의 기에 눌려서 변방 취급받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32] 와의 경쟁 구도 등이 주가 된다.
이에 비해 퍼시픽리그는 센트럴리그 자체에 반기를 들면서 '니네는 인기와 기믹으로 먹고 산다면 우리는 야구 실력으로 먹고 산다'라는 식으로 어필해 왔지만, 센트럴리그보다는 관중 동원 면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프로레슬링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성'이 그동안 일본 프로야구를 이끌어온 요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요미우리 구단, 혹은 요미우리 신문의 재정 상태가 나빠져서 특유의 돈지랄을 못 하든가, 아니면 어쩌다 리그 하위권에 오래 머문다든가 하는 경우 위에서 언급한 스토리라인이 깨지기 대문에 요미우리 뿐만 아니라 NPB 자체의 인기가 크게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날 정도이다.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에 선 팀들조차 결국은 거인의 인기로 인한 반사 이익을 얻기 때문에 프로야구의 판이 깨지는 극단적인 상황은 바라지 않는다. 특히 이 팀의 회장인 와타나베 츠네오의 경우 일본 야구 판도 자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이며, 전술되어 있듯 다나카 마사히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에 '우리 팀이었다면' 연봉 10억 엔을 주겠다고 발언할 정도로 일본 야구계에서 막강한 인사이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야구기구라는 행정기구가 있고, 커미셔너가 따로 존재[33] 하지만 요미우리의 입김이 매우 강력해서 모든 정책이 요미우리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 예로 1983년부터 2016년까지 KBO에서 사무총장을 포함한 다양한 직을 맡아서 NPB와도 이런저런 협력을 많이 한 이상일의 증언에 따르면 WBC 개최 협력을 위해 한미일 커미셔너들이 모인 자리에서 NPB 커미셔너는 MLB 사무국쪽 사람들에게 2004년에 퍼시픽 리그가 이미 진행중인데도 뉴욕 양키스와 탬파베이 데블레이스[34] 도쿄돔에서 MLB 개막전을 한 걸 가지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화를 냈고,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그는 나중에 그것이 요미우리측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된 거였다는걸 전해들었다고 한다. 아시아 시리즈의 경우도 요미우리측이 초반 3년간 운영을 전담하고 수익을 대부분 가져가서 한일중대만 협의에서 NPB 사무국 측이 불만을 토로하곤 했고 그런것이 결국 겹쳐서 엎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NPB 사무국을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야구계 큰 일을 처리히는 정도의 파워를 가진 것.
요미우리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중 하나는 중계권료인데, 일본프로야구 중계권료는 약 150억엔이며 이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중계권료가 전체 중계권료의 약 30%를 차지한다.[35] 라디오 중계도 타팀 마켓이 커버하지 못하는 방송국은 요미우리 중계 위주로 채우는 편. TBS가 빠진 지금은 닛폰 방송 중계로 채우는 편이다.
과거에는 자체적으로 유망주를 키워 V9[36] 을 달성하였으나[38] 90년대 초반부터 FA 제도가 시행된 이후 다른 팀에서 검증된 선수들을 많이 데려갔다.[40] 그런데 문제는 이 검증된 선수들이 이상하게 자이언츠에 입단하면 먹튀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미스테리이다. 용병들도 싹쓸이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며 로베르토 페타지니,[41] 터피 로즈 등 많은 선수들이 요미우리에서 시련을 겪었다(고쿠보 히로키, 알렉스 라미레스 등 예외는 있다).일본 내의 평가[42] 08 시즌 충격적인 일본 데뷔를 한 임창용도 결국 야쿠르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그 전까지는 요미우리가 데려갈 거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다만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2차 집권기부터는 육성 선수 제도 등을 활용해 야마구치 테츠야, 마쓰모토 테츠야처럼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는 등 팀의 자원을 유망주 육성에 더 쓰고 있으며 이를 통해 2000년대 후반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43] 물론 미국의 LA 다저스가 보여주듯 유망주 수집도 '''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시기에도 FA시장에 나온 대어급 선수들의 영입이 꾸준히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2006년 오가사와라 미치히로[44] , 2011년 스기우치 도시야, 무라타 슈이치 등이 있다. 물론 외부영입 성과가 퍼시픽리그 출신들의 경우 영 좋지 않아 소프트뱅크의 경우 요미우리가 모리후쿠 마사히코의 사례는 거의 은퇴직전 도쿄 효도관광 수준으로 모리후쿠에 비하면 스기우치, 2013년 트레이드로 이적한 타테오카 소이치로가 훨씬 더 돈값을 했을 정도다(...).
선수 스타팅 라인업 발표 시 타악기와 육성만 사용하는 두 구단 중 하나(다른 하나는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쪽은 응원 구호도 타 구단과 크게 차이난다. 다른 구단이 일본 프로야구 범용 구호[45] 를 사용하는 데 비해, 자이언츠는 축구 서포터즈의 응원 콜을 사용한다.[46] 또한 일본 야구 하면 생각나는 플라스틱 배트도 외야 서포터즈석으로 가면 잘 쓰지 않으며, 맨손 응원을 많이 하고 있다. [47] 그 외에는 다른 구단과 응원 스타일 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 편. 여담으로 안티 팬들이 많다 보니 자이언츠가 자기 팀의 응원을 베꼈다는 의혹이 자주 제기되기도 한다. 진실은 저 너머에... 굳이 다른 팀에서 볼 수 없는 문화를 꼽자면 적시타가 나올 때마다 머플러를 머리 위에서 돌리는 것이다.[48] 그러나 머플러 돌리기 자체는 지바 롯데가 원조다.
4. 명문 구단의 자부심
'''일본프로야구 뿐만 아니라 일본 스포츠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전국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기사 2014년 기준으로 889만 명을 보유하고 있어서 608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신 타이거스보다도 월등히 많다. 출처(일본어 원문)[49] 한신전도 요미우리 상대로는 시범경기까지 포함해 입장료가 더 올라간다.
이러한 인기의 이유는 역사와 실력, 그리고 모기업. 역사는 상술했듯 모체가 된 팀이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 즉 국가대표팀이고 이 팀이 하는 경기를 더 보고 싶다는 인기 덕에 생겨난 것이 프로야구이기 때문이다. 대동경야구구락부 창단이 1934년, 일본프로야구 창설이 1936년으로 문자 그대로 리그보다 팀이 먼저 존재했던 것이고 일본의 모든 종목을 다 통틀어 '''최초의 프로스포츠 구단'''이다.
게다가 일본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선수들인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의 선수가 동시에 전성기를 맞으며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엔 세계 프로스프츠에서 유례가 없는 V9를 달성할 정도로 시대를 주름잡은 강팀이었고, 그 전후로도 비밀번호 기간이 없을 정도로 꾸준히 강팀 자리를 유지했다. 그런 과정에서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많이 나타났고, 나중에는 이런 스타들을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커서 선수가 되어 교진에 입단해서 새로운 스타선수가 되고 다음 세대의 소년들이 또 그걸 보며 꿈을 키우는 선순환을 일으킨 것. 덕분에 이들의 인기는 날로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모기업인 언론사 요미우리 신문 역시 영향을 끼쳤는데,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으로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고, 이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에서는 당연히 자팀인 교진 선수들을 주로 다루었기에 당연히 이들의 인기가 높아질 수밖에는 없었다. 이후 시대가 흘러 신문에서 방송으로 미디어의 주도권이 넘어갔으나 요미우리는 전국단위 방송국인 닛폰테레비도 가지고 있다. 프로야구가 아직 전 경기 TV중계를 실시하기 전에는 예전 한국에서도 그랬듯 라디오 중계가 기본으로, TV로 야구를 보고 싶으면 가끔씩 지상파에서 중계를 해주거나, 아니면 지역 방송사에서 자기네 연고지 팀 경기 중계를 해주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지역방송에서 중계를 해 줄 연고 야구팀이 없는 지역에 사는 팬은 TV로 야구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지상파 TV채널인 닛폰테레비를 가지고 있고, 자사 채널에서 종종 자팀인 교진 경기 중계를 해주었다. 시골에 사는 팬들은 야구가 보고 싶으면 야구단이 있는 도시로 나가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TV로 볼 수 있는 야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가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 덕분에 야구단이 있는 지방을 뺀 다른 지역의 야구팬을 자연스럽게 팬으로 흡수했다. 지금은 케이블 TV와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보고싶은 팀 경기를 볼 수 있지만 그때 그 시절 이런 식으로 팬이 된 어린이들이 중장년~노년층이 된 지금도 그대로 팬으로 남아 있어 덕분에 설문조사를 하면 야구팀이 없는 지역에서는 대부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인기 1위를 차지한다.
또한 이렇게 역사와 인기를 다 가진 명문 팀이다 보니 야구를 넘어 일본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팀이라, 당연히 모기업에서도 구단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가 매우 크다. 자생을 하는 구단이나 지원을 받더라도 열악한 구단도 있는 데 반해 모기업 요미우리 그룹에서도 구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서 당장의 적자를 신경쓰지 않고 좋은 선수들을 많이 사 준다. 특급 선수가 FA로 나오면 행선지 제1순위로 꼽히는 팀은 항상 요미우리 자이언츠이며 매년 겨울 대대적인 보강은 연례행사로, 육성을 강화할 것을 천명한 2010년대 후반에도 FA와 고액 용병들을 매년 사들이는 돈지랄 구단. aav 수억 엔짜리 고액 FA를 매년 사제끼면서 무슨 육성이냐 싶지만, 교진 기준으로는 이것도 그냥 있는대로 가격표 안 보고 다 쓸어담던 예전에 비하면 많이 자제한 거다.(...)
자체적으로 길러내는 스타들도 많은데 이렇게 타 구단에서 최고의 스타들을 돈으로 영입하다 보니 이 스타선수들의 팬들을 그대로 요미우리 팬으로 흡수해 더더욱 인기가 늘어나는 것.
여튼 이렇게 역사와 성적, 스타성, 미디어와 모기업의 든든한 백업까지 갖추어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으로 군림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페이롤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5배를 기록하며 일본제일의 돈지랄 구단[50] 이라는 지위는 빼앗겼고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일본시리즈를 10년간 7번 우승하며 성적으로도 2010년대 들어 소프트뱅크에게 밀리며 , 평균관중수 1위 자리 또한 관서 제일의 빅클럽 한신 타이거스에게 빼앗기는 등 2010년대 들어 여러모로 예전만은 못한 침체기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인기 순위 1위, 팬클럽 회원 수 1위, 연봉총액 2위인 빅클럽이며 역사와 전통,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제1구단이라는 상징성으로 여전히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이자 인기구단으로 군림하고 있는 팀.
2군 경기장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의 경우에도 세금포함 1200엔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다. 대략 일반적으로 1군 경기도 1만5천원이면 내야석을 살 수 있고 2군 경기는 공짜인 한국 기준으로는 상상도 못 할 가격이고 내야석이 4~5만원 하는 일본 기준으로도 2군 경기 치고는 약간 비싼 가격. 자사 방송사를 동원해 방송 중계[51] 를 하다 보니 경기장 펜스 광고도 판매하고 있다. 펜스 광고의 경우 지역밀착 정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닛폰햄, 소프트뱅크도 도입하는 추세.
보다시피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요미우리 신문이라는 언론사를 등에 업은 빅 마켓 구단이라는 특성상 국내, 외국 선수 막론하고 끓는점이 굉장히 낮다. 대부분의 초인기 빅마켓 팀 선수들이 치르는 고역이긴 하지만, 요미우리는 그 정도가 심해서 10년을 잘하다 한달만 못해도 바로 역적으로 취급해 쫓아내기도 한다는 것. 외국인 선수는 본가인 요미우리 신문에서 물어뜯기 시작하면 그 선수는 사실상 퇴출된다고 보면 된다.[52] 심지어 요미우리신문, 니혼TV 외의 미디어에서도 2000년대 전까지 야구 관련 뉴스를 센트럴리그, 특히 요미우리 위주로 보도했던 경우가 많아서 이 '선수 때리기'는 일상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듯 구단도 ''''요미우리는 일본 야구를 대표한다''''라는, 명문 구단의 자부심이 강하다. 선수들에게 대접을 잘 해주는 대신 타 구단에는 없는 '''품위 유지 규정'''이 존재한다. 이승엽이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수염 못 길러.", "옆머리가 귀를 덮게 하지 마.", "껌 씹지 마.", "경기 중에 침 뱉지 마.", "귀걸이 하지 마.", "원정 경기 이동시에는 정장을 착용할 것." 등의 주의를 들었다고 한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나 알렉스 라미레스등 원래 팀에서 수염을 길렀던 선수들도 자이언츠에 들어간 이후에는 수염을 기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53] 또한 2019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 취임 이후 SNS 관련규정도 강화되어 고참 선수들을 제외하고 상당수 선수들이 시즌 중 SNS 업데이트를 중지하고 있다. 그 외 외국인 선수들의 경우 자기가 아무리 일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통역을 통해서만 인터뷰를 하도록 하고 있으며 당연히 일본어로는 인터뷰를 할 수 없다'''. 이는 터피 로즈가 공식인터뷰에서 요미우리를 대놓고 디스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54]
다만 이 품위유지 조항은 본래 명문화된 것은 아니었고, 요미우리 신문 초대 사주인 쇼리키 마쓰타로 회장과 구단주 와타나베 쓰네오 사장이 장발과 수염 등을 기르고 시합중에 껌 씹거나 하는 불량해 보이는 태도를 싫어했기에 선수들이 알아서 자제했던 것으로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었고, 공식적인 룰은 아니었기에 무시할 선수는 무시하고 수염 잘만 기르고 다녔다. 무시하는 선수라고 해도 코칭스탭이 어느정도 눈치 좀 줘도 쌩깔 수 있는 베테랑급, 특히 선수생활 말년에 잠시 들리는 타 팀 출신 베테랑[55] , 외국인 선수들 정도였지만...대표적으로 타팀 출신이었던 야시키 카나메나 타카하시 나오키, 교진 원클럽맨이지만 나가시마 시게오의 허락으로 콧수염을 길렀던 포수 무라타 신이치.[56] 외국인 선수들은 더해서 삼성에서도 뛰었던 갈베스나 스킨헤드에 중국인 수염 스타일을 하고 나왔던 외야수 헨리 코토, 자니 데이먼처럼 갈기머리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다녔던 용병타자 댄 글라덴 등등 많았다. 이게 품위 유지 규정으로 명문화된 것은 90년대 후반. 이때부터 아예 팀 내 규율로 못을 박아 버리며 우리가 아는 교진의 품위유지 규정이 생겨났다. 이른바 '''교진군은 항상 신사여야 한다''' 라는 말로 대표되는 규율.
'''물론 야구 외적으로도 사생활에 잡음이 없어야 한다는 건 덤이다.''' 이러한 룰을 지키지 않을 경우엔 아무리 성적이 좋고 인기 스타라 해도 용서가 없다. 3할 타율에 20홈런을 때릴 수 있는 유격수에다 교진 성골 스타였던 니오카 토모히로(二岡智宏)가 불륜 스캔들 한 번에 내쫓기듯 닛폰햄으로 투수인 하야시 마사노리와 묶여 트레이드 당한 사례가 좋은 예. 이 때 닛폰햄 팬들은 왜 사고친 선수를 데려오냐면서 험악한 반응이 나왔고 실제 안타갯수도 닛폰햄 이적 이후 전성기의 반으로 깎였다.[57] [58] 또한 '''야구 사설토토'''[59] 으로 문제가 되었던 타카기 쿄스케를 1년 자격정지 후 다시 기용하여 요미우리 팬들에게도 이게 무슨 스포츠맨십을 중시하는 구단이냐면서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우승에 대한 기준도 남달라 다른 팀의 경우는 리그 우승만 해도 포스트시즌의 졸전 여부와 상관없이 시즌 종료 후 우승 기념 이벤트를 여는 경우가 많지만, 거인은 오로지 리그 우승+일본시리즈 우승의 경우에만 우승 이벤트를 개최한다고 한다. 이 때 담당 백화점은 미쓰코시, 킨테츠.[60]
일본 최고의 인기 구단답게 간사이에도 팬이 상당히 있는 편이라 연 1회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홈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신의 압도적인 인기에 가려서 간사이의 요미우리 팬들은 '''카쿠레키리시탄''' 취급을 받았으나[61] 지금은 간사이에서 요미우리를 대놓고 응원하는 팬들도 많으며, 고베의 라디오칸사이에서 라디오닛폰[62] 중계를 받아 요미우리 편파 라디오 중계도 해 준다.
또한 오키나와현 출신 선수를 꾸준히 영입하고, 나하시에서도 시범경기 및 캠프를 가져서 오키나와에도 팬이 꽤 있는 편이라, 미야자키현에서와 같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함께 인기를 나눠먹고 있다. 하지만 미야자키 내에서 스프링캠프로 쓰는 구장인 선마린 스타디움은 인구규모에 비해 크기가 무식하게 큰 편이라 베어스포티비로 요미우리-두산의 연습경기가 중계될 때면 구장이 심각하게 휑하다.
5. 응원
6. 홈구장
일본프로야구 연고제 실시 이후부터 도쿄도 연고를 계속 해왔으며 고라쿠엔 스타디움을 거쳐 현재는 도쿄돔을 사용하고 있다.
전국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구단인 만큼 지방에도 요미우리팬이 많이 있기에 예전부터 지방구장 편성 경기를 많이 치뤄왔다. 현재도 9~10경기 전후를 도쿄도 외의 지역에서 홈경기를 하고 있다. 교류전 실시 전에는 삿포로와 후쿠오카 등지에서 경기를 치뤘으나 교류전 실시 후에는 파리그 홈구장 외 타 지역에서 개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3구장 시합은 매년 바뀌나 남큐슈와 오사카[63] , 기후[64] 에서는 매년 제3구장 시합을 치루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인해 홋토모토 필드 고베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3연전을 7월 10일~12일까지 주최하기도 했다.
7. 역사 및 시즌별 요약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2020년 기준으로 '''리그 우승 47회,[65] 일본시리즈 우승 22회'''라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66][67]
1934년 미국 대표 팀과 친선 경기를 치른 전 일본 야구 팀을 기반으로 창단되었으며, 창단 당시 이름은 '''대일본도쿄야구클럽(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68] )'''이었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 리그 출범 전에 시행한 미국 원정 기간에 당시 사용하던 명칭은 너무 길고 미국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필이 안 되는 이름이라 구단 창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뉴욕 자이언츠의 이름을 따서 '''도쿄 자이언츠'''라는 이름으로 미국 원정을 돌아다녔고, 귀국해서는 도쿄 거인군이라는 명칭을 썼으며 이 명칭은 2차 대전 종전까지 계속된다. 2차 대전 후 요미우리의 명칭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도쿄 요미우리 거인군이라는 이름을 썼고 영문 명칭 사용이 허용되고 야구 규약상 타 구단과 같은 방식으로[69] 맞추게 되어 정식 명칭이자 현재까지 사용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명칭이 확정된다.
다만 이때의 반동으로 이미 없어진 쿄진(거인의 일본 발음)을 팀의 상징적으로 병렬 사용하며 이게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중계 때 주로 사용되는 축약어도 '''巨'''. 하지만 공문서에는 야구 규약에 명시된 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이름만 사용되기 때문에 팬들 사이뿐만 아니라 언론에서 애칭이 정식 명칭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세계적으로 봐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가 정착되었다.
이후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재팬 시리즈 9년 연속 우승(V9)이라는 세계 프로 스포츠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의 고도성장과 함께 컬러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고 슈퍼스타 듀오 왕정치(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의 ''ON포''의 맹활약이 어우러지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V9 시대가 종료된 후에 1975년 구단 창립 이후 사상 첫 센트럴리그 꼴찌를 경험하게 되나 1981년, 1989년, 1994년, 2000년, 2002년, 2009년, 그리고 2012년에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등 지금까지도 명문 팀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워낙 V9 시대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렬한 탓에 V9 시대 이후에도 강팀이었던 기간이 길었지만 그때만큼의 임팩트는 주지 못하고 있기도.
2007년 이후의 각 시즌 별 요약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시즌 참조.
8. 관중수 추이
9. 순수혈통주의
10. 유니폼
11. 여담
11.1. 한국선수에 대한 인연
과거에는 이팔용[70] , 장훈, 김경홍, 김일융, 이승엽, 조성민, 정민철, 정민태 등 많은 한국인, 재일 한국인 선수들을 두고 있었다.
여러모로 자매구단인 삼성 라이온즈와 인연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재일동포인 김일융이 삼성에 발을 딛은 게 시초다.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종훈과 김한수, 김현욱과 삼성 출신 선수인 황두성은 요미우리 코치 연수에 다녀온 적이 있었고 '''이승엽'''도 한 때는 지바롯데에서 뛰다가 2006년 하라 감독 복귀와 요미우리 전력증강으로 영입하였다. 요미우리 입단 첫 해인 2006년에는 팀의 4번 타자로 활약하며 41개의 홈런을 치는 등[71] 맹활약 덕분에 시즌 후 무려 '''4년 총 30억엔'''이라는 초대형 계약을 맺었지만 2008년 이후 잔부상으로 인한 하향세가 이어지자 요미우리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계약기간 동안 2010년까지 이승엽을 데리고 있었다. 이승엽은 2011년 오릭스를 거쳐 2012년부터 다시 삼성에 복귀하여 2017시즌 후 은퇴했다. 삼성 출신은 아니지만 삼성에서 3시즌간 뛴 적이 있던 김기태와 김기태도 있다. 공교롭게도 '''사고치는 꼬라지도 자매구단과 같이 쌍으로 치고 다니는 중이다.'''
현재는 삼성 라이온즈보다는[72] 스프링캠프지 미야자키와 오키나와를 같이 쓰는 두산 베어스와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고토 코지 코치 부임 이후로 아베 신노스케와 박세혁 선수가 오프시즌 기간 동안 훈련을 같이 하기도 하고, 고토 코치의 요미우리 컴백 이후 두산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오키나와 연습경기에 초대받기도 했다. 실제로도 두산과 요미우리는 운영 측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편.[73]
11.2. 기요하라에게 고개숙인 감독 & 코치들의 굴욕
위에서 설명한 순혈주의를 완벽하게 무시한 사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기요하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시절 파리그의 다른 팀 출신임에도 자기 따르는 선수들을 모은 파벌을 결성했다. 이 파벌은 '''기요하라 군단'''으로 불릴 정도로 팀 내에서 위세가 높았으며 실제로 기요하라는 팀에서 왕 노릇을 했다. 감독이고 코치고 그를 제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요하라가 코치에게 자리 비키라고 반 협박을 해도 코치가 알아서 비켜주기도 했을 정도니...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요미우리에게 있어서는 타팀출신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휘둘려버리는 감독 & 코치의 모습이 드러났으니 제대로 망신살. 더군다나 방송으로 찍던 말던 오다 코헤이를 대놓고 괴롭히는 기요하라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아서 오다가 야구선수로써 기량발전을 못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어찌보면 방관은 더 나쁜 것일지도.
11.3. 한때 NPB에서 상대 구단 올킬이었던 구단
여기서 올킬이라 하면 모든 상대 리그 팀을 일본시리즈에 만나 격파한 것이다. 일본시리즈 우승이 22회로 많은 편인데다 퍼시픽 리그 팀이 나름 골고루 올라와서 가능한 것이다. 반대편 사이타마 세이부도 13회 우승이 있고, 모든 팀을 만났지만 한신과 디엔에이에게 져서 2킬이 부족한 상황이다. 소프트뱅크와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승패를 주고받았고(당시는 난카이, 다이에였다), 그 후 세이부, 오릭스, 롯데, 닛폰햄, 긴테츠를 꺾으며 올킬 달성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왜 "이었던"이냐 하면 오사카 긴테츠가 오릭스 버팔로즈로 합병되면서 사라지고 도호쿠 라쿠텐이 들어왔기에 올킬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쿠텐 하나만 이기면 라쿠텐 들어오고 올킬로 회복할 수 있었으나,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74] 에게 지는 바람에 올킬 달성은 후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게다가 긴테츠가 오릭스 버팔로즈로 합병되고, 난카이,다이에가 소프트뱅크로 바뀌면서, 진정한 올킬을 위해선 소프트뱅크, 오릭스 버팔로즈까지 격파를 해야 된다.
'''그 사이 2010년대에 퍼시픽 리그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가 무서운 기세로 센트럴 리그 팀들을 9년만에 올킬해버리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2번째이자 현존하는 팀들 상대로는 유일하게 전 구단 격파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와중에 요미우리는 2019년 일본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에게 사대빵 참패를 당하면서, 일본시리즈에서 같은 팀에게 두 번 스윕패를 당한 유일한 팀이라는 굴욕을 세웠다.(1959년 난카이와 대결해서 스윕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2020년 다시 한 번 소프트뱅크에게 일본시리즈 스윕패를 당하며 이 기록을 하나 더 늘렸다.
11.4. 센트럴리그 유일 6연속 B클래스 기록 없음
비밀번호란 나무위키 자체 기준, 6년 연속 하위권이다. 워낙 명문 구단 이미지도 있고, 실력도 크게 나쁜 적이 별로 없기에 비밀번호를 찍은 적이 없다. 이전엔 길어봐야 3년이었던 주니치와 유이했으나 2013년 이후 주니치가 침체에 빠지며 기어코 비밀번호를 생성. 유일하게 비밀번호를 만들지 않은 센트럴 구단이 되었다.
한편 퍼시픽 구단에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여기에 해당하는 유일한 팀이다. 6자리 채우기 전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 간간히 끊어냈다.
11.5. 전세계 유일의 같은 팀에게 파이널 시리즈 3번 스윕당한 팀
1959년 난카이 호크스에게 스윕으로 패한 후, 2019년 난카이가 이름이 바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스윕을 당하면서, 일본 시리즈에서 같은 팀에게 두 번 스윕당한 유일한 팀이 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2020년... 일본시리즈에서 또 다시 만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2019년보다 더 처참하게 털리며 스윕을 당하면서 자국리그를 넘어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특정팀에게 3번 스윕패를 당한 팀'''이라는 오점을 떠안게 되었다.
반대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특정 팀을 3번 스윕한 유일한 팀이 되었다.
11.6. 4번타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4번타자들을 제oo대 4번타자 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나무위키 문서 등록 선수 기준으로 미즈하라 시게루는 6대, 카와카미 테츠히루는 7대, 요나미네 카나메는 24대, 나가시마 시게오는 25대, 오 사다하루는 28대, 모리 마사히코는 30대, 장훈은 39대, 데이비 존슨은 41대, 나카하타 키요시는 45대, 하라 다쓰노리는 48대, 워렌 크로마티는 50대, 코마다 노리히로는 52대, 오쿠보 히로모토는 59대,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60대, 마쓰이 히데키는 62대, 키요하라 노리히로는 64대,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66대, 페타지니는 68대, 고쿠보 히로키는 69대, 이승엽이 70대, 아베 신노스케는 72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는 73대, 알렉스 라미레스는 74대, 초노 히사요시는 75대, 무라타 슈이치는 76대, 사카모토 하야토는 82대, 오카모토 카즈마가 89대, 마루 요시히로가 제90대이자 역대 마지막 4번타자다.
12. 선수 목록
13. 역대 감독
보면 알겠지만 양대리그 분리 후에는 깔끔하게 '''한번도 시즌 도중에 감독이 교체되거나 한 적이 없으며''' 2015년까지 '''65년동안 10대에 걸쳐 단 7명만이 감독에 재임'''하여 감독 임기도 평균 6.5년으로 수명도 길다. 물론 나가시마, 후지타, 하라의 경우에는 중간에 한번 물러났다가 다시 지휘봉을 잡은 케이스이기는 했지만 이들 감독들도 장기간 감독자리에 앉으면서 팀을 안정되게 이끌었다.
14. 역대 성적
14.1. 단일리그 시대
14.2. 양대리그 분리 이후
15. 네임드 팬
- 고바야시 세이지
- 김승우
- 나스 유토[88]
- 나카이 마사히로 [89]
- 나카야마 유마
- 노하라 히로시(가상인물)[90]
- 니노미야 카즈나리[91]
- 다케우치 유코
- 다니가키 사다카즈
- 도모토 코이치[92]
- 바바 후미카
- 사사키 노조미
- 사카모토 하야토[93]
- 시노다 마리코
- 시손 쥰[94]
- 사쿠라이 쇼[95]
- 사이토 후유카[96]
- 스가노 도모유키[97]
- 아카시야 산마
- 아베 신노스케[98]
- 아베 히로시
- 아오이 유우[99]
- 아오이 츠카사[100]
- 아오야마 고쇼[101]
- 아이자와 리나
- 아시다 마나[102]
- 아키모토 야스시
- (...)[103]
- 이노우에 다케히코 [104]
- 이토이 시게사토 - 일본의 국민 카피라이터.
- 오하시 노조미
- 오오츠카 아이
- 장동건
- 카가와 신지[105]
- 카게야마 히로노부[106]
- 코다 쿠미
- 쿠마키 안리[107]
- 쿠리야마 치아키
- 키타가와 케이코[108]
- 키타노 키이
- 타카야마 미나미[109]
- 타카노 나오코
- 타카쿠라 켄[110]
- 타케다 테츠야
- 타케우치 아카리
- 하시모토 칸나
- 혼다 히토미 : AKB48 팀8, IZ*ONE 멤버.[111]
- 후루카와 모토아키[112]
- Hey! Say! JUMP 멤버들
- PATA
16. 관련 문서
17. 둘러보기
- 최상단 표에서 보듯 한번 더 우승했으나 등재 신청을 하지 않아 과거 기록이 등재되어 있다.
18. 우승 이력
[1] 자이언츠('''Gia'''nts)+토끼(Rab'''bit''')[2] 양대 리그 출범 이전.[3] 정식 선수는 아니지만 2000시즌부터 전 쌍방울 레이더스 출신 유환진씨가 21년째 불펜포수로 근무하고 있다. 핵심 투수들이 훈련이나 컨디션 점검을 할때 너나 할것없이 유환진씨부터 찾는다고 한다.[4]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인 선수는 없으나 예전부터 한국인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어 홈페이지가 상당히 충실하다. 심지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티켓 구매 절차가 설명되어 있고 리다이렉트되는 영어 페이지에서 구매가 가능하다.[5] 비록 늦게 생겼으나 트위터 일본지사와 협력하여 센트럴리그 구단 중 트위터를 열심히 활용하고 있다. 일본지사에서 하는 트위터 Q&A도 선보이며, 오프시즌이나 경기가 없는 날에는 팬들에게 자체적으로 질문을 받아서 올려주기도 하는 편.[6] 2018~2019년 이후 컨텐츠가 베어스포티비와 상당히 유사해졌는데, 고프로를 통해 우승직후 순간을 중계하기도 했다.[7] 주로 도쿄돔 홈경기 하이라이트와 감독 인터뷰, 홍보 영상들을 올리며 2020년에는 360도 카메라를 이용한 경기 실황 중계도 했었다.[8] 사실 팀명은 2번 바꿨지만, 두 번 다 일본프로야구 출범 년도인 1950년보다 앞서서 일어났다.[9] 하지만 도쿄돔이 2018년부로 개장 30주년을 지나고, 공연, 스포츠 행사 등으로 인한 구장 노후화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신구장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 등의 착공이 확정되며 요미우리 팬들 사이에서도 홈구장 신축 후 이전계획이 논의되고 있다.[10] 타 팀은 물론 자이언츠 팬마저 요미우리를 비하 명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정자체로 쓰면 그 비하효과가 더 커져서 요미우리 팬들도 극히 싫어한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YOMIURI 유니폼. 이 유니폼이 나오자 팬들이 피꺼솟해서 "우리는 요미우리의 팬이 아니다! 자이언츠의 팬이다!"는 플래카드를 내걸며 항의했다.[11] 정작 전직 구단주였던 와타나베 츠네오는 아키히토, 나루히토처럼 야스쿠니 참배에 매우 부정적이라서 고이즈미 쇼군과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 이승엽이 요미우리로 입단했을 당시에는 절정이었다.[12] 재일교포와 재일한국인의 대부분이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방에 살고 있어서 요미우리의 인기도 은근히 있는데, 야구를 보러 가면 요미우리로 많이 간다. 게다가 도쿄돔에는 구장 내 '한비제'에서 비빔밥, 김밥, 양념치킨, 치즈핫도그 등을 판매하는데 줄 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가 좋은 편. [13] 금요일의 경우, 프로레슬링 중계와 인기 드라마 방송 등이 우선시 되었다.[14] 게다가 간토권 독립방송국도 요미우리 중계권을 확보하지 않아 선 텔레비전이 있는 한신과는 달리 공중파 완전 중계는 원천적으로 꿈도 꿀 수 없다. 단, 선테레비도 도쿄돔 경기는 중계 못 한다.[15] 다만 토요일 아침 니혼TV의 <줌인 새터데이>에서 프로야구 넷케츠(熱ケツ情報)정보라는 이름으로 요미우리 OB인 미야모토 카즈토모(현재는 미야모토가 요미우리 코치로 부임하면서 츠지오카 기도 아나운서가 인터뷰를 맡고 있다.)가 요미우리 선수들을 야구와 관련 없는 주제로 미니 인터뷰하기도 한다.[16] 2018 시즌부터 중계권료 상승 등의 문제로 야구 중계 포기.[17] 특히 NRN 망을 통한 전국 중계로 닛폰방송 경기가 방송되는 경우가 많으며, 야쿠르트 홈 경기는 닛폰 방송이 단독으로 중계한다.[18] 주말 야간경기 중계. 2011 시즌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주말 야간경기가 축소되면서 비중이 크게 줄었고, 2019 시즌부터 주말 중계를 포기했다. 평일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편파 중계를 편성한다.[19] 이 4개 구단 중 야쿠르트를 제외한 구단들은 2017년 DAZN, Sportsnavi 서비스로 인터넷 중계를 시작하였다.[20] 스포츠호치는 고교야구 전문잡지를 발행하는 유일한 스포츠신문사이다.[21] 보통 종목 불문하고 가장 인기가 많은 명문팀이면 안티도 제일 많다. 당장 같은 야구 리그인 MLB만 봐도 뉴욕 양키스가 팬 숫자와 안티 숫자가 압도적이고 축구에서도 분데스리가에서 독주하고 있는 FC 바이에른 뮌헨도 팬과 안티가 제일 많은 팀이다. 실제로도 요미우리 계열 스포츠지로도 국내에 잘 알려진 스포츠호치에서는 요미우리 담당기자인데 정작 기자 본인이 안티 요미우리고 오사카본사 대표가 한신팬인 사례가 있기도 했다(...). 기자칼럼 스포츠호치도 12구단 담당기자가 엄연히 다 있어서 완전한 요미우리 편파는 아니니 오해는 금물이고, 해당 기사에서도 스포츠호치 12구단 담당기자들의 기사 및 SNS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하였다. 실제로도 스포츠호치는 팬들이 트위터에 구단을 막론하고 다뤄 주는 주제가 있으면 SNS에서 검토 후 바로 다뤄 준다. 또한 니혼 TV는 더 비범해서 안티 요미우리 연예인이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팬인 아리요시 히로이키를 MC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테마 예능프로그램 '아리요시X교진'을 만들기도 했다.[22] 물론 예외도 있어서 1979년 성적이 하위권으로 하향된 뒤 실시된 지옥의 시즈오카현 이토 전지훈련도 있는데, 당시 참여한 선수들에 의하면 토 나올 정도로 운동했다고 한다. 휴일에도 쉬느라 숙소 바깥으로 나가질 못했다고...[23] 특히 타카기 하야토의 경우 세이부 이적 이후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고 방출되었다.[24] 유타 재즈의 명 파워포워드이자 통산득점 2위[25] 주니치 팬들의 야유 영상으로 위 영상 1:00부터 '''시네! 시네! 쿠타바레!'''(死ね死ねくたばれ=죽어! 죽어! 뒈져버려!)를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상속에 나오는 노래는 요미우리의 응원가인 "투혼을 담아(闘魂こめて)"인데 후렴구인 유케 유케 소레 유케(行け行けそれゆけ=가라 가라 나아가라)가 흘러나오면 원정팬들은 어느 팀 팬이건 간에 가운데 손가락을 요미우리를 향해 갈기면서 다같이 큰소리로 시네 시네 쿠타바레를 외친다. 반면에 요미우리 선수들과 타팀 선수들은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장으로 유명했으나, 그 요미우리도 2018년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조의를 보냈던 호시노 센이치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경기 중에는 요미우리와 싸우지만 경기장 바깥에서는 (서로를 동업자 혹은 정당한 라이벌로 보고) 사이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일부 팬들은 돈지랄로 선수 사들이는 것을 비꼬아 "상혼을 담아(商魂込めて)" 라며 아예 가사를 요미우리 비하 가사로 바꾸어 노래를 열창한다. 이 때문에 도쿄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vs 한신 경기에서 '시네 시네 쿠타바레'가 2017년 8월 26일 그대로 NHK 프로야구 중계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8년 8월 25일에도 똑같이 저 일이 터졌다. 근데 웃긴건, 투혼을 담아의 작곡가인 코세키 유지는 '''주니치'''의 前 구단가 드래곤즈의 노래도 작곡한 바 있다(...)(참고로 그 곡은 한때 구장에서 반주곡까지 틀어줄 정도로 자주 쓰였으나 타올라라 드래곤즈가 유명해진 후 나가리가 된(...) 비운의 곡(?)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롯데노 파쿠리~(롯데 베낀거~)'를 외쳐주면서 마무리하는 것이 포인트.[26] 이 팀의 응원가 음원영상 같은 경우에는 2020년 5월 기준으로 조회수 119만회에 좋아요가 2238개, '''싫어요가 1225개다.'''(...) 참고로 같은 업로더가 올린 한신 타이거스의 응원가인 롯코오로시는 2018년 9월 기준으로 좋아요 1200개에 싫어요 212개다. 일본 제일 안티구단의 위엄을 보여주는 부분.[27] 중계 방송에서 '''시네 시네 쿠타바레'''가 원래 응원가를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2019년 클라이막스 4차전('''도쿄 돔''')에서마저 '''한신 팬'''들이 이런 일을 만들어냈다. [28] 일본프로야구에서 야구인에게 주는 '''최고 권위의 상''' 이름부터가 쇼리키 마쓰타로상이다.[29] 요미우리가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 투수 벳쇼 다케히코를 영입하면서 생긴 일명 '벳쇼 빼내기 사건'을 저질렀으며, 또한 위시한 오리온즈를 거부하는 팀들이 센트럴 리그를, 가입에 동의하는 팀들이 퍼시픽 리그를 출범하게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요미우리가 단초를 제공했다.[30] 특히 요미우리-한신과의 대결은 '''전통의 일전'''으로 불리며, 2016년 시즌부터 양팀의 레전드인 타카하시 요시노부와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양 구단이 '전통의 일전'을 공식적으로 더비매치의 명칭으로 사용하며 공동 마케팅을 통해 이 라이벌리를 다시 띄우는 중이다. [31] 신문 및 방송사업 에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주니치와는 지방방송국 지분을 가진 동업자이기도 하다. 지방방송국에서 서로의 지분을 뺀다면 방송사경영이 어려워진다.[32] 이쪽은 응원가인 도쿄온도에 팬들이 '''쿠타바레 요미우리(뒈져버려 요미우리)라는 추임새를 넣는다.'''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신 팬.''' [33] 2000년대 들어 세토야마 류조를 비롯한 퍼시픽리그 출신들이 커미셔너에 취임하면서 요미우리의 힘은 조금 줄어든 상태.[34] 당시 이름 기준[35] 하지만 TV 시청, 라디오 청취 환경 변화와 함께 요미우리의 성적이 떨어지는데도 중계권료가 너무 높아 요미우리 경기 중심으로 중계하던 TBS라디오가 2018년부터 야구중계를 그만두었다.[36] 9년 연속 우승[37] 선수, 코치를 불문하고 히로오카 타츠로를 필두로 한 OB 출신들의 간섭이 심각한데, 이에 대해 야구선수들과 팬들이 정면충돌한 게 2020년 이하라 하루키의 하라 타츠노리 선수기용 저격 논란으로 이하라는 요미우리 팬들뿐만 아니라 일본 야구팬들에게도 까였다. 심지어 장훈도 이 건에 대해선 OB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이하라에게 동의하지 않았다.[38] 그러나 요미우리는 2000년대 츠지우치 타카노부를 필두로 드래프트와 육성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선수들이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박살나는 막장 육성시스템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으며, 트레이드된 선수들이 오히려 더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다 보니 2017년 팀 OB 스즈키 타카히로도 FA 선수에 대한 지나친 의존 및 당장의 성적을 위한 근시안적 운용, 고위관계자의 지나친 간섭[37] 으로 인해 젊은 선수들이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성장도 멈추는 팀내 분위기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에 오카모토 카즈마가 홈런을 뻥뻥 터뜨리고 두산 베어스를 KBO 리그의 타격성적 1위로 키워낸 고토 코지 코치가 돌아오면서 육성에도 조금 희망이 보이는 분위기이며, 2019년 시즌 종료 후에는 FA 영입을 자제하고 있다.[39] 코쿠보의 경우는 경영위기를 겪었던 다이에의 프런트가 심히 개판이라 참다 못해 본인이 트레이드를 직접 요청한 케이스로, 2006년 FA로 소프트뱅크에 인수된 호크스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코쿠보의 경우 요미우리보다는 소프트뱅크 프랜차이즈스타 이미지가 훨씬 강한 편이고, 요미우리 팬도 개판 다이에 프런트로 인하여 이적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분위기. 실제로 전술한 프랜차이즈 스타 영입사례 중 친정팀으로 돌아와 은퇴식을 치른 선수는 코쿠보뿐이다.[40]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필두로 히로사와 카츠미(야쿠르트), 이시이 히로오(긴테쓰), 키요하라 카즈히로(세이부), 에토 아키라(히로시마), 코쿠보 히로키(다이에)[39] 등 각 팀에서도 4번 타자를 맡았던 프랜차이즈 스타 들을 대거 대려왔다.(다만 코쿠보는 트레이드로 영입) 투수 영입은 상대적으로는 소박했지만 역시 쿠도 키미야스등 빅네임들이 있었다.[41] 페타지니의 경우 기존 1루수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쓰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우익수로 출장시켰다가 무릎 부상을 당했던 바 있다.[42] 준수한 활약을 펼친 선수라도 '''워낙 투자한 액수가 커서''' 적자로 평가한 사례들도 있다.[43] 하지만 쵸노 히사요시, 사와무라 히로카즈, 스가노 도모유키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자금력과 명성, 뒷공작 등을 이용해 드래프트 최대어를 미리 확보해 놓는 등 과거와 같은 패악질을 일삼고 있기도 하다. 물론 스가노의 경우는 자기 외삼촌이 당시 감독이던 하라여서 교진을 가고 싶어했던 면도 있었지만, 닛폰햄 등 퍼시픽리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와중 요미우리가 오히려 해외진출 족쇄가 되어버린 상황.[44] 요미우리의 수많은 FA영입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 중 하나였다. 4년의 계약기간 내내 평균 140경기에 출전, 3할 30홈런 OPS 9할 이상을 기록하며 MVP 1회, 정규시즌 리그우승 3회, 일본시리즈 우승 1회의 주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 찾아온 급격한 노쇠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45] 범용 구호는 "오~ 소레! ○○○(선수명)". 참고로 치바 롯데 역시 범용 구호 사용하지 않고 한국 야구에서 쓰는 콜을 주로 쓴다.[46] "(짝짝짝) ○○○!(선수명)". K리그이 경우를 들면 한 선수당 두세 번 사용하는데, 자이언츠는 이들 중 세 번을 외친다.[47] 응원 도구를 적극적으로 쓰는 한신과는 크게 대조적인 부분이다.[48] 이는 1975년부터 시작된 NFL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테러블 타월> 문화와도 상당히 유사하다. 응원타월 문화도 피츠버그가 원조.[49] 참고로 팬덤 수에서 3위~5위까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292만 명), 주니치 드래곤즈(288만 명),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279만 명) 순이다.[50]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소프트뱅크는 요미우리와는 달리 외부 FA에 집착하는 돈지랄이 아니라 자체적인 내부 육성으로 키워낸 선수에게 다년계약을 제시하는 식의 돈지랄로 페이롤을 올렸다. 이외에도 2군과 3군에 투자하는 비용도 상당하다.[51] 이 때문에 2020년 코로나19가 터지기 전 베어스포티비 등으로 KBO 구단들이 진행한 일본 스프링캠프 중계에 요미우리 팬들이 보이기도 했다(...).[52] 이승엽 선수가 "요미우리는 나에게 모든 것을 줬고 또 나에게 모든것을 빼앗아 갔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53] 오가사와라는 자이언츠가 수염 길러도 좋다고 한 '''엄청나게 드문 사람'''인데 자기가 알아서 깎고 다닌다. 이러한 규정은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도 비슷하게 존재한다. 정돈된 콧수염까지는 봐주는데 그 이상은 금지. 예를 들면 조니 데이먼은 보스턴에서 뛸 때에 길렀던 수염을 양키스 이적 후에 밀어버렸다. [54] 2005년 4월 26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알렉스 라미레스가 친 큼직한 타구를 쫓아가다 잡지 못했다. 당시 요미우리 수비주루 코치였던 히로타 스미오가 이 점을 두고 "수비는 발로 하냐?"라고 깠고, 결국 빡돈 로즈는 히로타 코치의 멱살까지 잡으며 격한 언쟁을 펼쳤다. 경기 후 로즈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말리는 통역을 제압하고 기자들에게 일본어로 직접 '''"이거 기사로 내라. 오늘 경기 진게 내 탓이라고 히로타 씨가 그랬다. 일본에서 10년이나 뛰었는데도 나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없다. 투수가 저렇게 얻어터진 것도 내 탓인가? 투수도 나쁘다. 다 나쁘다. 자이언츠 이 좆 같은 새끼들. 난 자이언츠가 아주 싫다. 난 도쿄로 돌아갈꺼다."''' 란 폭언을 했다.[55] 선수생활 말년에 잠깐 영입되어서 1~2년 뛰다 가는 선수들은 어느 팀이나 대놓고 손님 취급이다. 어차피 타팀에서 와서 팀내 사정이나 문화도 잘 모르고, 가르쳐 주기엔 연차도 최고참인데다 한 1년~2년 하고 어차피 은퇴할 선수이기 때문. 타중대 개말년병장이 사정상 1달 정도 같이 생활한다고 생각해보자...[56] 나가시마의 기행 중 하나로, 초년병 시절 무라타에게 "얼굴에 박력이 없으니 수염을 기르라" 는 조언을 해서 수염을 기르게 되었다. 당연히 일본야구 그 자체인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가 한 말이니 구단주조차 어쩔 수가 없었다...[57] 니오카는 야마모토 모나와의 불륜 하나로 문책성 트레이드가 된 건 아니고, 그 전에 후배 선수인 야노 겐지와 동석한 술자리에서 영 좋지 않은 곳의 털을 라이터로 태우면서 그 후배 선수는 고통스러워하는데 낄낄 웃으면서 병신짓한 게 걸려서 구단이 발칵 뒤집어진 후 2연타로 터진 것이었다. 쫒겨날 만했다. 그 전까지 모범적인 이미지가 강한 선수였기에 이 2연타 병크로 두 얼굴의 사나이 & 모나오카 등등으로 불리며 엄청나게 까였다. 닛폰햄으로 하야시 마사노리와 같이 트레이드됐을 때 마지막 기자 회견에서 울먹거리면서 인터뷰를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달랐던 듯... 그리고 니오카는 닛폰햄에서 그저 그런 활약을 펼치다가 은퇴 후 2016년 요미우리에 2군 타격코치로 복귀했다. 정작 그 다음에 3순위로 뽑혔던 카토 켄은 백업포수로 2군과 1군을 왔다갔다하며 니오카가 코치로 돌아온 2016년에도 선수로 뛰고 있었다. 참고로 니오카의 동기 중 1순위로 뽑혔던 건 우에하라 코지고 2018년에 요미우리로 10년만에 복귀했다.[58] 스기우치는 트레이드를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FA영입이라 10억엔 이상의 초고액 잔여계약이 남아있어서 어지간한 팀은 그냥 준대도 부담되는 선수인데다 당해 성적이 좋은 선발투수라 바꾸는 팀도 기둥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32세로 딱 전성기가 끝날 때라 앞으로 성적이 하락세일 게 뻔한 선수라서 이런 연봉은 초고액인데 앞으로 하락세가 예상되는 선수를 위해 코어자원을 내주겠다고 나서는 팀이 없으니 트레이드를 못한 것. 니오카는 트레이드되던 해 연봉은 2억엔으로 스기우치의 절반 이하였고 닛폰햄에서 저 불륜을 빌미로 또 깎여서 주전야수 치고는 저렴한 선수였다.[59] 야구도박의 경우 KBO 리그도 방출 등의 강경한 징계를 내린다.[60] 2005년 킨테츠 구단 해체 이후로 오릭스 버팔로즈의 우승 세일은 AEON이 담당한다. 2008년 한신난바선 개통 이후 요미우리 우승기념 세일광고가 고시엔구장을 지나가면 심히 난감해지기도 한다.[61] 이게 어느 정도냐면,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서 요미우리 팬 학생이 한신 응원가 롯코오로시를 모른다고 담임에게 비국민 취급을 받거나 직장에서 어제 야구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한신팬이라 간주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기사에 나온 요미우리 응원 이자카야에서도 "간사이에서 장사하려면 한신 응원해라" 전화가 와서 주인이 "불만 있으면 우리 점포로 와라"라고 맞불을 놓기도. 그래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간사이의 요미우리 팬들을 이 기사에서 '간사이 유산'으로 선정하며 강팀을 응원하는 건 자랑이니 기죽지 말고 요미우리 응원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웃긴건 간토지역에 있는 도쿄에도 한신타이거즈 팬이 존나게 많다는거다.[62] 간사이에서 웬만하면 TV, 라디오를 막론하고 요미우리-한신전 경기는 도쿄 쪽 방송국이 아닌 오사카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해서 중계한다.[63] 근데 무려 라이벌팀인 '''한신 타이거즈 제2홈구장'''이자 오릭스 버팔로즈의 홈구장인 교세라 돔에서 치른다.[64] 나고야시는 주니치 드래곤스의 홈경기지역이므로 위성도시인 기후에서 개최[65] 센트럴 리그 우승 38회, 양대 리그 성립 이전 리그 우승 9회를 합해 총 47회이다.[66] 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많은 챔피언십 우승을 이룬 구단은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뉴욕 양키스다.[67] 전구단 격파도 2004년까지는 갖고 있었다. 1951년 난카이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를 시작으로, 1963년 니시테츠 라이온즈(現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967년 한큐 브레이브스(現 오릭스 버팔로즈), 1970년 롯데 오리온스(現 치바 롯데 마린즈), 1981년 닛폰햄 파이터즈(現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898년 긴테쓰 버팔로즈(해체 당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까지 꺾었다.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창단 이후 이 막내만 못 꺾었는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처럼 못 만나서 못 꺾은 게 아니고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만났는데 3승4패로 패배했다.[68] 참고로 한자로 되어 있는 구락부는 '클럽'의 음차자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거의 이 표기로 썼으며 현재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음차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다 이렇게 음차한 듯하다.[69] 지역명+고유명이나 기업명+고유명 등 최대 2단 구조로만 맞추고, 축약명 1단으로 하는 것. 2단 구조를 처음으로 깬 구단은 1969년 지역명, 기업명 표기를 다 하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이며, 1단 축약명 규칙을 깨부순 건 1978년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다.[70] 무려 일본프로야구 수많은 감독들 중에 '''유일한 한국태생 감독'''이었다.[71] 사실 고쿠보 히로키와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드르렁크리만 안왔으면 홈런왕도 가능했다. 하지만 집중견제에 시달리다가 태평양같은 나고야돔을 홈구장으로 쓰는 타이론우즈에게 빼앗겼다.[72] 삼성은 오치아이 에이지 2군 감독, 세리자와 유지 전 배터리코치 부임 이후로 오히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교류가 늘어났다.[73] 수도 연고지, 순혈주의(~2000년대), 워크에씩 중시, 등.[74] 당장 스가노부터 라쿠텐에게 드라마틱하게 진 경험이 있다(...).[75] 사실상 교진군에서 공인하는 초대 감독이다. 일본프로야구 공식전이 시작된 1936년부터 감독을 맡았기 때문. 후일 퍼시픽/타이요 로빈스, 킨세이-다이에이 스타즈, 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았으며, 1962년에 한신을 양대 리그제 실시 이후 최초의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뒤 1964년에도 또다시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62년엔 도에이 플라이어즈에게, 64년엔 난카이 호크스에게 패배한 콩라인이기도 했다(...)[76] 요미우리 역사상 유이한 외국인감독(다른 한명은 왕전즈)인데 왜 그런지는 항목참조. 625전쟁 이후에 일본으로 귀화했다.[77]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78] 1936년에 봄에 열린 「제1회 일본 직업야구 리그전」에는 불참했고 1936년 봄리그와 가을리그 사이에 열린 「연맹결성기념 전일본 야구선수권대회」부터 참가 했다. 본격적으로 리그에 참가한 건 1936년 가을리그부터이나 연맹결성 기념대회 성적도 정식 성적으로 친다.[79]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순회공연처럼 치른 1936년의 봄, 가을 리그전과 연맹결성 기념대회는 각 팀이 치르는 경기 수가 들쭉날쭉이라 따로 종합순위를 매기지는 않았다. 프로야구 첫해라 시범경기처럼 치렀다고 생각하면 될 듯[80] 클라이맥스 시리즈 이전에는 승률 1위라도 다승을 못하면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거기서 지면 2위로 떨어졌다. [81] 2006년까지는 리그 우승만 일본시리즈로 진출, 2007년부터 A클래스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괄호 안은 상대팀.[82] 전설의 리버스 스윕이 일어난 경기,일명 이나오 시리즈[83] 그 유명한 V9시대의 시작이다.[84] 모든 경기가 고라쿠엔 구장에서만 치러졌다.[85]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슷한 케이스가 자매구단인 대구 삼성 라이온즈가 기록한 2013년 한국시리즈.[86] 일본판 2007년 한국시리즈다. 실제로 홈에서 2패를 당하고, 그 이후 4연승을 하였다.[87] 이로써 같은 팀에게 2번 스윕패를 당한 굴욕을 만들었다.[88] 쟈니스Jr. 美 少年의 멤버. 190713 쟈니스주니어채널, 나스 유토에 대한 퀴즈를 맞추는 기획에서 "유토가 좋아하는 프로 야구팀은?"이라는 질문에서 '쿄진 자이언츠'를 좋아한다고 언급. 또, 좋아하는 선수가 있냐는 동료의 질문에 "사카모토 하야토(坂本勇人) 선수"라고 언급한 바가 있음. https://youtu.be/SdXbBLWbwP8 2:55~4:11[89] SMAP의 리더. 요미우리 연예인 팬의 대명사 격으로 야구 관련 예능 프로에서 MC를 맡으면서 틈만 나면 자이언츠 팬심을 어필한다. 심지어 야구 선수, 감독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연예계 대표 야구 매니아로 통한다. [90] 크레용 신짱의 등장인물이 맞다.[91] 어린 시절 꿈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도쿄 돔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92] 방송에서는 간사이 이미지 제대로 내면서 정작 야구는 요미우리 팬(...)[93] 현재 요미우리의 유격수. 어릴 때부터 요미우리 팬이었던데다 나머지 11개 구단의 안티(...)였다. 동시에 한신 타이거즈를 엄청 싫어해서, 한신 팬들을 먼지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94]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타카하시 요시노부.[95] 실제로도 요미우리 선수단이 VS아라시에 출연하여 아라시 멤버들과 대결한 적이 있다.[96] 2016년 당시 공식 블로그에 부모님이 요미우리 팬이고 본인도 요미우리의 리그 우승을 응원했는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해서 축하한다고 언급하였다.[97]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이자, 일단 외삼촌이 선수 데뷔부터 은퇴, 코치 생활, 감독 생활까지 쭉 요미우리에서만 했던 하라 타츠노리이다.[98] 현재 요미우리 2군 감독으로, 어릴 때부터 요미우리의 팬이었으나 정작 가장 동경한 선수는 한신 타이거즈 레전드인 카케후 마사유키.[99] 드라마 오센 홍보 영상에서 팬임을 밝힘.[100] 간사이출신임에도 요미우리 팬임을 인스타에 대문짝만하게 인증해놨다.[101] 명탐정 코난 작가.[102] 가족 모두 요미우리 팬. 심지어 한신 고시엔 구장 옆도시인 효고현 아시야 출신이다.[103] 정작 이 선수는 요미우리는 커녕 센트럴리그 팀에 간 적도 없다.[104] 모두들 다 아는 슬램덩크의 작가. 괜히 정우성의 원본 이름이 사와키타 에이지이고 정우성의 아버지인 정광철의 원본 이름이 사와키타 데쓰하루인 게 아니다. 심지어 이름의 한자도 같다.[105] 도르트문트 소속의 축구 선수. 요미우리 구단의 시구도 했다.[106] 요미우리 팬이고, 이승엽을 좋아했다고 한다.[107] 본인의 공식 블로그에서 밝힘.[108] 아버지는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시라고 한다.[109] 위의 아오야마 고쇼와 전 부부 사이였다. 연애 당시에 같은 요미우리 팬이라는 것에 가까워졌었다고.[110]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과 생전 친밀한 관계였다.[111] 인스타그램에 도쿄돔 직관 다녀온 사진을 올리기도 했고 아이즈원 멤버들과 함께 이승엽 선수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 V LIVE 희희낙락 컨텐츠를 하는 도중에 요미우리 가을야구가 확정되기도..[112] 게임 작곡가.[113] 시구경기 팬서비스로 잠깐 보여줬다.[114] 도쿄 돔 홈 구장에 해설자 캐스터 맡았다.[115] Hey! Say! JUMP 멤버 가수. 사이조 우먼 뉴스기사에서 "급격의「거인팬」고백" 밝힘.[116] 제작사가 니혼 TV가 아닌 오사카 준키국인 요미우리 TV다. 아이러니한 점은 요미우리TV가 간사이권 방송국 중에서 한신 응원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117] 이 애니 제목은 마이니치 방송에서 훗날 한신 소식 전담코너인 '한신의 별'로 패러디되며 베이스볼 투나잇을 방불케 하는 약빤 한신전 하이라이트 편집 을 선보였다. [118]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스코트였던, 사람 얼굴 같은 공이 배트에 탄 모양새인 '배트에 탄 소년(バットに乗った少年)'을 표절한 "방울이" 를 본인들 마스코트로 사용했다. 쌍방울 레이더스 항목 참조.